800조 청사진의 이면… '속도'가 가려버린 9조 원의 경고음
[기자수첩] 800조 청사진의 이면 , 세계적 정세 불안과 ‘속도전’이 마주한 9조 원의 청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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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조 원대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2030년 6월 첫 양산 돌입.”
페이스 캡처
전남·광주가 행정통합의 기틀을 다진 이후, 더불어민주당과 정부가 강력한 입법 드라이브를 걸며 주도하는 이번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청사진은 그야말로 화려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광주 군공항 종전 부지에 각각 2기씩 총 4기의 팹(Fab)을 짓고, 무안 이전이 완료되기도 전에 63만 평을 ‘선(先)개발’하겠다는 발상은 속도전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 속에서 ‘일단 삽부터 뜨고 보자’는 집념 자체를 탓할 이는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직면한 세계적인 정세의 불확실성과, 민주당이 주도하는 통합 과정에서 급조되듯 쏟아지는 장밋빛 공약의 이면을 돌아보면 로드맵만 믿고 달리기에는 대외적·구조적 리스크가 너무나 크다. 미·중 공급망 갈등, 보호무역주의 강화, 그리고 환율과 금리의 요동 속에서 반도체 거대 투자는 과거와 다른 차원의 높은 문턱을 넘어야 한다.
안 그래도 안팎으로 살얼음판을 걷는 형국인데, 당의 주도권과 성과 과시에만 매몰되어 무리한 스피드전을 밀어붙이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이번 프로젝트의 가장 취약한 고리는 단연 ‘군공항 이전’이라는 구조적 모순이다. 현행 ‘기부 대 양여’ 방식에 따르면, 새 공항을 완공해 국가에 기부해야 비로소 옛 부지를 넘겨받을 수 있다. 무안군 새 공항 준공 목표가 2032년인데, 어떻게 2030년 6월에 반도체 양산이 가능하겠는가?
이 타임라인의 모순을 정면돌파하기 위해 민주당 의원의 대표발의 등 당 차원에서 꺼내 든 카드가 바로 ‘선 양여 특례’다. 국방부가 새 공항이 완공되기도 전에 국가산단 부지를 먼저 넘겨주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물론 속도를 내기 위한 고육지책이지만, 여기에 글로벌 정세 불안까지 겹치면 부메랑의 파괴력은 배가 된다.
대외 공급망 위기로 글로벌 기업들의 투자 속도가 조절되거나 자금줄이 경색되는 상황에서, 만약 무안 새 공항 건설마저 지연되거나 주민 반발로 좌초된다면? 이미 선 양여를 받아 팹을 짓고 있는 정부와 기업들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 선 양여는 특혜가 아니라, 불확실한 대외 환경 속에서 리스크를 키우는 ‘조건부 도박’에 가깝다 할 것이다.
특히 국감에서 불거진 총사업비 9조 원(종전부지 인수가액 5조 원 + 개발비 4조 원)과 평당 514만 원의 추정 조성원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 광주 첨단3지구(평당 약 241만 원)나 빛그린 산단(평당 약 77만 원)과 비교하면, 이 숫자가 얼마나 무거운지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세계 경제가 고물가·고금리의 상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지금,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입되는 산단 개발은 재정적 압박으로 직결된다.
이처럼 부지를 산단으로 용도 변경하면서 당초 주거·상업용지 개발로 메우려던 재원 공백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무안 지원사업비 1조 원 중 6400억 원의 재원 구멍, 국비와 지자체 간의 분담 비율 갈등, 민간 기업이 감당해야 할 막대한 기반시설 분담금 등이 그것이다.
국제 유가와 원자재 가격 변동성이 커진 현 정세에서 공사비는 언제든 더 뛸 수 있으며, 결국 이 비용의 향방은 기업의 투자 채산성과 직결된다. 대외 경기 침체로 수익성이 악화되는 시점에, 폭등한 조성원가까지 겹친다면 기업들은 투자를 재검토할 수밖에 없다. 잘못하면 지자체가 재정 파탄의 위기에 직면하는 ‘승자의 저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반도체 공장은 ‘전기와 물 먹는 하마’다. 1단계로 요구되는 전력만 3.1GW, 최종 6.3GW에 달한다. 23㎞에 이르는 지중 송전선로 공사가 내년 6월에 시작된다 한들, 인허가와 주민 수용성 문제 등 변수는 지천에 깔려 있다. 한전과 수요기업 간의 전력망 구축비 분담(한전 20%, 기업 80% 추산) 역시 여전히 협의 중인 사안이다.
글로벌 공급망 불안으로 핵심 전력 설비 수급마저 차질을 빚는 마당에, 막대한 인프라 비용을 민간과 공기업이 원만히 분담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용수 역시 마찬가지다. 주암댐과 보성강댐을 끌어다 쓴다지만, 기후변화로 인한 가뭄과 수자원 불확실성이 커진 세계적 추세 속에서 장기 수원 확보 계획이 꼬이기라도 하면 2030년 양산은 사상누각이 된다.
최태원 SK 회장이 “전력과 용수가 늦어져도 공사부터 하겠다”며 의지를 내비쳤지만, 전력망과 용수관로가 깔리지 않은 팹은 깡통 공장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전남·광주의 행정통합 이후 더불어민주당과 정부의 강력한 주도 하에 추진되는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는 국가 균형발전과 미래 먹거리를 위해 반드시 성공해야 할 메가 프로젝트다. 삼성과 SK라는 양대 축이 호남에 뿌리를 내린다는 상징성 또한 대단히 크다.
그러나 지금은 전 세계가 보호무역주의와 경제 안보 위기로 숨을 죽이고 있는 비상 시국이다. 민주당이 주도하는 입법 레이스와 성과 위주의 드라이브에 밀려, 근거 없는 낙관론이나 '2030년 무조건 양산'이라는 조급한 스피드전을 강요할 때가 아니다.
요동치는 글로벌 경제 및 반도체 시황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투자 전략, 일방적 입법 추진을 넘어선 실효성 있는 특별법 개정의 정당성 확보, 그리고 국비와 지방비 및 기업 간의 투명한 비용 분담 구조 확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것이다.
이 과제들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800조 원이라는 거대한 수식어는 불안한 세계 정세 속에서 한낱 정치적 구호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민주당과 정부가 주도하는 통합의 청사진이 빛을 보려면,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는 일방통행식 속도전이 아니라 현장의 목소리를 담은 치밀한 정합성이 먼저여야 한다.
삽을 뜨기 전에 먼저 시멘트가 제대로 배합되었는지 확인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물리적인 공기(工期)보다, 속도라는 이름 아래 지워져 버린 수많은 현실의 경고음들이다.
2030년의 화려한 준공 테이프를 끊기도 전에, 9조 원이라는 거대한 빚의 청구서가 호남 경제의 숨통을 조여오는 비극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역사는 언제나 조급함이 낳은 기형적 성과보다, 기본에 충실했던 묵묵한 진정성 편에 손을 들어주었다.